페르난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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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난도 3세는 레온 왕국의 알폰소 9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베렝겔라의 아들로, 카스티야와 레온을 통합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1217년 카스티야 왕위를 계승한 후 레콩키스타를 추진하여 코르도바, 세비야 등을 함락했으며, 1230년 레온 왕위를 물려받아 두 왕국을 통합했다. 페르난도 3세는 군사적 성공 외에도 종교적 관용과 문화적 유산을 남겼으며,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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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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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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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유형 | 군주 |
이름 | 페르난도 3세 |
칭호 | 카스티야와 톨레도의 왕 |
통치 기간 | 1217년 8월 31일 ~ 1252년 5월 30일 |
대관식 | 알 수 없음 |
선임자 | 베렝겔라 |
후임자 | 알폰소 10세 |
칭호1 | 레온과 갈리시아의 왕 |
통치 기간1 | 1230년 9월 24일 (사실상) 또는 1230년 12월 11일 (법률상) ~ 1252년 5월 30일 |
대관식1 | 알 수 없음 |
선임자1 | 산차와 둘세 (법률상), 알폰소 9세 (사실상) |
후임자1 | 알폰소 10세 |
배우자 | 엘리자베트 (1219년 결혼, 1235년 사망) 잔 (1237년 결혼) |
자녀 | 알폰소 10세 페데리코 헨리 데 세나토르 발데코르네하 영주 펠리페 세비야 대주교 산초 비예나 영주 마누엘 오말 백작 페르난도 2세 잉글랜드 여왕 엘레오노르 |
가문 | 카스티야 이브레아 가문 |
아버지 | 알폰소 9세 |
어머니 | 베렝겔라 |
출생일 | 1199년/1201년 |
출생지 | 레온 왕국, 페레아스 데 아리바, 발파라이소 수도원 |
사망일 | 1252년 5월 30일 (50–53세) |
사망지 | 카스티야, 세비야 |
매장지 | 스페인 세비야, 세비야 대성당 |
성인 정보 | |
이름 | 성 페르난도 3세 |
칭호 | 알 수 없음 |
시성일 | 1671년 |
시성 결정자 | 클레멘스 10세 |
기념일 | 5월 30일 |
수호 대상 | 세비야, 기타 |
2. 생애
페르난도 3세는 레온 왕국의 알폰소 9세와 카스티야 왕국 알폰소 8세의 딸인 베렝겔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폰소 9세와 베렝겔라의 결혼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무효화되었으나,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상속권은 인정되었다. 페르난도는 아버지를 따라 레온에서 살았다.
1217년 카스티야 왕국의 왕 엔리케 1세가 사고로 사망하자, 베렝겔라는 엔리케 1세의 사망 소식이 레온 왕국에 전해지기 전에 사절을 보내 페르난도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오도록 했다. 페르난도가 도착하자마자 베렝겔라는 그에게 카스티야 왕위를 넘겨주었다. 레온의 알폰소 9세는 베렝겔라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페르난도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 및 카스티야 귀족들과 경쟁해야 했다. 그러나 페르난도의 능력과 베렝겔라의 역량은 알폰소 9세와 귀족들을 능가하였다.
페르난도는 어머니 베렝겔라의 조언에 따라 필리프 폰 슈바벤의 딸인 슈바벤의 베아트리세와 결혼하였고, 무어인과의 전쟁을 수행하였다. 1230년 알폰소 9세 사후 레온 왕국의 왕위를 평화적으로 물려받았다.
페르난도는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이 통합된 이후 이베리아반도 내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레콩키스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236년 코르도바를 함락하였으며 1248년에는 세비야를 함락하였다. 그라나다의 왕은 페르난도와 주종관계를 맺어야 했다.
페르난도는 알비파를 심하게 적대시하였는데, 이는 훗날 그가 시성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페르난도는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페르난도는 첫 번째 아내 베아트리세가 사망한 후 퐁티외 백작 시몬 드 다마르탱의 딸인 잔 드 다마르탱과 결혼하였다. 이들 사이의 딸인 엘레노어는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1세와 결혼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카스티야 왕위 계승
페르난도는 레온 왕국의 알폰소 9세와 카스티야 왕국 알폰소 8세의 딸인 베렝겔라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폰소 9세와 베렝겔라의 결혼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혈족 결혼을 이유로 취소되었으나, 이들 사이의 자손들의 상속권은 인정되었다.[1] 페르난도는 아버지를 따라 레온에서 살았는데, 1217년 카스티야 왕국의 왕 엔리케 1세가 사고로 사망하였다. 카스티야의 여왕이 된 베렝겔라는 엔리케 1세의 사망 소식이 레온 왕국에 전해지기 전에 사자를 보내 페르난도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오도록 하였고, 그가 도착하자마자 페르난도에게 카스티야의 왕위를 넘겼다.레온의 알폰소 9세는 자신이 속임수를 당했다고 생각했고, 젊은 왕은 그의 아버지와 카스티야 귀족들의 일파와의 전쟁으로 그의 통치를 시작해야 했다. 그와 그의 어머니의 능력은 레온 왕과 그의 카스티야 동맹군에게는 너무 과분했다. 베렌가리아는 전쟁 수행은 물론, 슈바벤의 엘리자베트와의 결혼 상대 선택에서도 페르난도에게 계속해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
페르난도 3세의 정확한 출생일은 불분명하나, 최근 연구자들은 대체로 1201년 여름으로 보고 있다. 페르난도는 현재 사모라 주에 있는 발파라이소 수도원(펠레아스 데 아리바)에서 태어났다.
페르난도는 양쪽 모두에서 레온과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의 후손이었다. 그의 외조부 카스티야의 산초 3세와 그의 부계 할아버지 레온의 페르디난드 2세는 알폰소 7세의 아들이었고, 그의 왕국은 이들 형제 사이에 분할되었다. 페르난도는 그의 외할머니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딸)와 그의 부계 할머니 포르투갈의 우라카로부터 다른 왕족 조상들을 두고 있었다.
1230년에 아버지가 죽자 레온의 계승자였던 두 명의 이복 누이를 설득하여 레온 왕위도 계승함으로써 레온을 카스티야에 병합하였다.
2. 2. 레온 왕위 계승과 두 왕국의 통합
페르난도는 레온 왕국의 알폰소 9세와 카스티야 왕국 알폰소 8세의 딸인 베렝겔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폰소 9세와 베렝겔라의 결혼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무효화되었으나,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상속권은 인정되었다. 페르난도는 아버지를 따라 레온에서 살았다.1217년 카스티야 왕국의 왕 엔리케 1세가 사고로 사망하자, 베렝겔라는 엔리케 1세의 사망 소식이 레온 왕국에 전해지기 전에 사절을 보내 페르난도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오도록 했다. 페르난도가 도착하자마자 베렝겔라는 그에게 카스티야 왕위를 넘겨주었다. 알폰소 9세는 베렝겔라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페르난도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 및 카스티야 귀족들과 경쟁해야 했다. 그러나 페르난도의 능력과 베렝겔라의 역량은 알폰소 9세와 귀족들을 능가하였다.
1230년 알폰소 9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유언에 따라 왕국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얻은 장녀 산차와 둘체에게 상속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페르난도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했다. 베렝겔라와 테레사, 두 어머니 사이의 협상을 통해 1230년 12월 11일 베나벤테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페르난도는 이복 여동생들인 산차와 둘체에게 상당한 현금과 토지를 보상하는 대가로 레온 왕국을 받게 되었다.[1]
이로써 페르난도는 1157년 알폰소 7세 사망 이후 처음으로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 두 왕국의 통합 군주가 되었다.[1] 즉위 초기에 페르난도는 라라 가문의 반란을 겪기도 했다.[1]
2. 3. 레콩키스타의 진전
1212년 라스나바스데톨로사 전투 이후 스페인에서 알모하드 왕조의 진격이 멈추자, 카스티야 왕국과 알모하드 왕조의 안달루시아 지배 지역은 다소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1224년 유수프 2세 사후 알모하드 칼리파 국가에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하면서 페르난도 3세에게 개입할 기회가 생겼다. 안달루시아 출신의 왕위 계승자 압달라 알아딜은 알모하드의 무기와 병력 대부분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모로코로 보내 경쟁자와 왕위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안달루시아는 상대적으로 방어가 허술해졌다. 알아딜의 반란을 일으킨 사촌인 압둘라 알바야시(바에사 출신)는 침략자에 대항해 페르난도 3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1225년 카스티야 군대는 알바야시와 함께 하엔 공성전 (1225년)에 참여하여 하엔 주, 그라나다 베가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그해 말까지 알바야시를 코르도바에 성공적으로 앉혔다. 대가로 알바야시는 페르난도에게 바뇨스델라엔시나, 살바티에라(구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시우다드레알 근처 요새), 카필라(마지막 요새는 포위 공격으로 함락) 등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경 요새들을 제공했다. 알바야시가 코르도바에서 인민 봉기로 폐위되고 살해된 직후에도 카스티야인들은 안두하르, 바에사, 마르토스에 있는 알바야시의 영지를 점령한 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알모하드 칼리파 국가의 위기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1228년 새로운 알모하드 왕위 주장자 이드리스 알마문은 스페인을 버리고 알모하드 군대의 마지막 잔여 세력과 함께 모로코로 떠났다. 안달루시아는 이븐 후드(무함마드 이븐 유수프 이븐 후드 알주드하미)가 느슨하게 지휘하는 지역 세력의 손에 분열된 채 남겨졌다. 이 기회를 포착한 북쪽의 기독교 왕들 –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 알폰소 9세 (레온), 하이메 1세 (아라곤), 산초 2세 (포르투갈) –은 즉시 안달루시아에 대한 일련의 습격을 시작했고, 거의 매년 반복되었다. 큰 전투는 없었다. 이븐 후드의 급조된 안달루시아 군대는 1230년 알란헤에서 레온 군을 막으려다 초기에 궤멸되었다. 기독교 군대는 남부를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질주했다. 개별 안달루시아 도시들은 스스로 저항하거나 항복을 협상해야 했고, 모로코나 다른 곳에서 구원받을 가능성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1228년부터 1248년까지 20년 동안 레콩키스타에서 가장 대규모 진격이 이루어졌다. 이 대규모 진격에서 안달루시아의 대부분의 옛 거점 도시들이 하나씩 함락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가장 많은 전리품을 차지했다. 1230년 레온 군에 함락된 바다호스와 메리다를 곧 페르난도가 상속받았다. 그 후 페르난도 3세는 다음과 같은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연도 | 도시 |
---|---|
1231년 | 카소르라 |
1233년 | 우베다 |
1236년 | 우마이야 왕조 수도인 코르도바 |
1238년 | 니에블라와 우엘바 |
1240년 | 에시하와 루세나 |
1243년 | 오리우엘라와 무르시아 (유명한 알카라스 조약에 의함) |
1244년 | 아르호나, 뮬라, 로르카 |
1245년 | 카르타헤나 |
1246년 | 하엔 |
1248년 | 알리칸테 |
1248년 12월 22일 | 안달루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세비야 |
20년에 걸친 이 공격이 끝난 후에는 그라나다 에미르국이라는 작은 안달루시아 국가만이 정복되지 않은 채 남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도 3세는 1238년 그라나다로부터 조공을 받아냈다).
페르난도는 정복한 영토 중 일부를 직접 카스티야 왕관에 편입했고, 다른 영토는 무슬림 총독(예: 알리칸테, 니에블라, 무르시아)의 봉신 국가로서 처음 받아들여 조직되었지만, 결국 13세기 말까지 카스티야에 영구적으로 점령되어 흡수되었다(니에블라 1262년, 무르시아 1264년, 알리칸테 1266년). 이러한 봉신 국가를 제외하고, 기독교 통치는 새로운 무슬림 백성들에게 가혹할 수 있었다. 카스티야의 정복 범위는 때때로 다른 정복자들의 이해관계 영역을 침범하기도 했다. 따라서 페르난도 3세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다른 기독교 왕들과 조심스럽게 협상했다. 예를 들어, 알미스라 조약(1244년 3월 26일)은 무르시아의 경계를 하이메 1세 (아라곤)과 구분했다.
2. 4. 내치와 종교 정책
페르난도 3세는 살라망카 대학교를 강화하고 현재의 부르고스 대성당을 건립하는 등 국내 정책에도 힘썼다. 그는 교회 내 최신 운동인 탁발 수도회의 후원자였다. 베네딕토회 수도사들과 시토회, 클뤼니 수도회가 레콩키스타에 큰 역할을 했던 반면, 페르난도 3세는 안달루시아 전역에 도미니크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트리니다드회, 메르세 수도회 수사들을 위한 수도원을 설립하여 그 지역의 미래 종교적 성격을 결정했다.[1] 그는 안달루시아의 ''콘비비엔시아''(공존)를 유지한 공로도 인정받고 있다. 그는 스스로 성 프란체스코 제3회에 가입했으며, 그 수도회에서 존경받고 있다.페르난도 3세는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지 않도록 주의했는데, 이는 그가 한 가난한 여자의 저주를 온 사라센 군대보다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다.[2]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뛰어난 지휘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가진 그는 국왕군과 기사단 등의 혼성군을 지휘하여 이웃 국가들과 귀족들과의 분쟁을 거의 일으키지 않고 레콩키스타를 완수했다. 안달루시아 도시들에 대한 항복 조건은 관대했으나, 프리에고나 칸티야나 등의 도시를 공격하여 주민을 학살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강하게 저항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슬림 주민들에게 모든 소지품을 가지고 떠날 것을 허락했고, 남아 있는 자들도 도시를 떠나는 것을 전제로 농촌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했다.[3]
그는 타이파들의 항쟁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처음에는 바이야스, 다음에는 후드, 나아가 무함마드 1세와 연합 상대를 바꾸면서 레콩키스타를 진행하여, 최종적으로 무함마드 1세를 신하로 삼고 조공과 군사 지원까지 받아냈다. 교황을 정점으로 성직자들과 교회, 수도원 등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고, 그들 덕분에 페르난도 3세는 레콩키스타를 사실상 종결짓게 되었다.[3]
한편, 그는 종교에 관대한 면도 있어 안달루시아 도시들에 대한 항복 조건이나 무함마드 1세와의 종속 관계에도 그러한 사정이 보인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위에 군림하는 “삼종교의 왕”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스스로 그렇게 자칭하기도 했던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 대성당에 매장되었고, 아들 알폰소 10세가 만들게 한 묘비에는 당시의 다언어 사회를 반영하여 카스티야어 외에 아랍어, 히브리어, 라틴어로 묘비명이 새겨졌다. 이것은 다민족·다종교 국가를 이상으로 하여 그 계승을 후대의 국왕에게 남긴 유언이 되고 있다.[4]
후에 페르난도 3세는 레콩키스타 성공의 공적을 인정받아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왕”(el Santo)의 칭호를 받았다. 이는 사촌이자 역시 “성왕”이라 불리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나란히 평가받는 것이다. 하지만 13세기의 교황들은 페르난도 3세가 이교도를 포용하고 있던 사실 때문에 시성하지 않았고, 400년 이상 후에 스페인이 교황청에 탄원한 결과였다.[5]
2. 5. 죽음과 유산
페르난도 3세는 1251년 겨울에 수종을 앓아 1252년 5월 30일에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아들 알폰소 10세에 의해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되었다.[2] 1252년 6월 1일, 세고비아의 주교 레몬도(Remondo)가 장례식을 집전했으며, 왕의 신하, 주교, 수도원장, 그리고 왕국의 부유한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기 위해 모였다. 그의 무덤에는 아랍어, 히브리어, 라틴어, 초기 카스티야어의 네 가지 언어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페르난도 3세는 처음에는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툼을 벌였지만, 사망할 무렵에는 아들 알폰소 10세에게 크게 확장된 왕국을 물려주었다. 페르난도 3세가 세운 새로운 카스티야 왕국의 영토는 15세기 후반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의 전기 작가인 성심 수녀회(Handmaid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 A.C.J.)의 마리아 델 카르멘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 카베사(María del Carmen Fernández de Castro Cabeza) 수녀는 페르난도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너는 다른 어떤 그리스도교 왕보다 더 많은 땅과 훌륭한 신하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페르난도 3세는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오늘날 성 페르난도의 부패하지 않은 시신은 세비야 대성당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그는 왕다운 금과 수정 관에 안치되어 있으며,[2] 머리에는 여전히 금관이 씌워져 있고, 성모 마리아상 아래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이름을 딴 산 페르난도라는 여러 도시가 스페인 제국 전역에 세워졌다. 그의 초상, 즉위식, 검과 구는 세비야 축구 클럽의 문장에 묘사되어 있다. 그의 왕권의 상징은 로베라 검이었다.
3. 가족 관계
페르난도는 레온 왕국의 알폰소 9세와 카스티야 왕국 알폰소 8세의 딸인 베렝겔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1219년, 페르난도는 필리프와 이레네 안젤리나의 넷째 딸인 엘리사베트 스바비아(1203~1235)와 결혼했다.[3] 그녀는 1212년 자매가 사망한 이후 베아트리스로 이름을 바꾸었다.[3]
페르난도와 베아트리스 사이에는 10명의 자녀가 있었다.
1237년, 페르난도는 퐁티우 백작 부인 잔과 재혼하였다.[5]
페르난도와 잔 사이에는 5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페르난도 | 1238년 | 1264년/1269년 | 오말 백작 |
엘레오노르 | 1241년경 | 1290년 |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결혼 |
루이 | 1243년 | 1269년 | |
시몬 | 1244년 | ? |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톨레도의 수도원에 매장 |
존 | 1245년 | ? |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코르도바의 대성당에 매장 |
4. 평가 및 영향
페르난도 3세는 뛰어난 군사적 지휘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바탕으로 국왕군과 기사단 등의 혼성군을 지휘하여, 이웃 국가 및 귀족들과의 분쟁을 거의 일으키지 않고 레콩키스타를 완수하였다. 이는 연대기 작가들도 인정하는 바이다. 안달루시아 도시들에 대해서는 관대한 항복 조건을 제시했으나, 프리에고나 칸티야나 등 일부 도시에서는 주민 학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하게 저항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슬림 주민들에게 모든 소지품을 가지고 떠날 수 있도록 허락했고,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시를 떠나는 조건으로 농촌 거주를 허용했다. 타이파들의 항쟁을 이용하여 바이야스, 후드, 무함마드 1세와 순차적으로 동맹을 맺으며 레콩키스타를 진행했고, 최종적으로 무함마드 1세를 신하로 삼아 조공과 군사 지원을 받았다. 교황을 정점으로 한 성직자, 교회, 수도원의 재정 지원은 페르난도 3세가 레콩키스타를 사실상 종결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페르난도 3세는 종교적으로 관대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안달루시아 도시들에 대한 항복 조건이나 무함마드 1세와의 종속 관계에서 이러한 점이 드러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위에 군림하는 “삼종교의 왕”을 이상으로 삼고 스스로 그렇게 자칭하기도 했던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 대성당에 매장되었고, 아들 알폰소 10세가 만든 묘비에는 카스티야어, 아랍어, 히브리어, 라틴어로 묘비명이 새겨졌다. 이는 다민족·다종교 국가를 이상으로 여겼던 페르난도 3세가 후대 국왕에게 남긴 유언으로 해석된다.[2]
후대에 페르난도 3세는 레콩키스타 성공의 공적을 인정받아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왕”(el Santo)의 칭호를 받았다. 이는 사촌이자 “성왕”으로 불리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비견되는 평가이다. 그러나 13세기 교황들은 페르난도 3세가 이교도를 포용했다는 이유로 시성하지 않았고, 400년 이상 지난 후에 스페인이 교황청에 탄원하여 이루어진 결과였다.[3]
4. 1. 레콩키스타에 대한 공헌
페르난도 3세는 레콩키스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224년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프 유수프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발생한 내란과 분열을 틈타, 페르난도 3세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1225년 하엔을 공격하고, 코르도바와 바에사에서 칼리프를 자칭한 인물과 협력하여 여러 도시를 함락시키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1230년 아버지 알폰소 9세의 사망으로 레온 왕국의 왕위를 계승한 후에도, 페르난도 3세는 레콩키스타를 계속 추진했다. 1233년 우베다를 점령하고, 1236년에는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였던 코르도바를 함락시켰다. 이후에도 에시하, 루세나, 오리우엘라, 무르시아, 하엔, 알리칸테 등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정복했다.[1]
1246년,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비야 주변의 요새 도시들을 먼저 함락시키는 전략을 세웠고, 1247년부터 본격적인 세비야 포위전에 돌입했다. 1248년, 세비야는 결국 항복했고, 페르난도 3세는 12월 22일에 세비야에 입성했다. 이로써 레콩키스타는 사실상 종결되었고, 그라나다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이 기독교 세력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2]
페르난도 3세는 정복한 영토를 기사단, 교회, 귀족들에게 분배하고, 리베르 후디시오룸을 시민들이 채택하도록 하는 등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그는 또한 알비파를 심하게 적대시했으며, 이러한 업적들로 인해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3]
4. 2. 종교적 관용과 억압의 경계
페르난도 3세는 탁발 수도회를 후원했다. 베네딕토회 수도사들과 시토회, 클뤼니 수도회가 레콩키스타에 큰 역할을 했던 반면, 페르난도 3세는 안달루시아 전역에 도미니크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트리니다드회, 메르세 수도회 수사들을 위한 수도원을 설립하여 그 지역의 종교적 성격을 결정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안달루시아의 ''콘비비엔시아''를 유지한 공로도 인정받고 있다. 그는 성 프란체스코 제3회에 가입했으며, 그 수도회에서 존경받고 있다.페르난도 3세는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지 않도록 주의했는데, 한 가난한 여자의 저주를 온 사라센 군대보다 더 두려워했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1]
종교적으로 관대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는데, 안달루시아 도시들에 대한 항복 조건이나 그라나다 왕국의 무함마드 1세와의 종속 관계에서 이러한 점이 드러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위에 군림하는 “삼종교의 왕”을 이상으로 삼고 스스로 그렇게 자칭하기도 했던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 대성당에 매장되었고, 아들 알폰소 10세가 만든 묘비에는 카스티야어, 아랍어, 히브리어, 라틴어로 묘비명이 새겨졌다. 이는 다민족·다종교 국가를 이상으로 여겼던 페르난도 3세가 후대 국왕에게 남긴 유언으로 해석된다.[2]
훗날 페르난도 3세는 레콩키스타 성공의 공적을 인정받아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왕”(el Santo)의 칭호를 받았다. 이는 사촌이자 “성왕”으로 불리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비견되는 평가이다. 그러나 13세기 교황들은 페르난도 3세가 이교도를 포용했다는 이유로 시성하지 않았고, 400년 이상 지난 후에 스페인이 교황청에 탄원하여 이루어진 결과였다.[3]
4. 3. 문화적 유산
페르난도 3세는 살라망카 대학교를 강화하고 현재의 부르고스 대성당을 건립했다. 그는 탁발 수도회라는, 당시 교회 내 최신 운동의 후원자였다. 베네딕토회 수도사들과 시스테르시오회, 클뤼니 수도회가 레콩키스타에 큰 역할을 했던 반면, 페르난도 3세는 안달루시아 전역에 도미니크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트리니다드회, 메르세 수도회 수사들을 위한 수도원을 설립하여 그 지역의 미래 종교적 성격을 결정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안달루시아의 ''콘비비엔시아''를 유지한 공로도 인정받고 있다.[1] 그는 스스로 성 프란체스코 제3회에 가입했으며, 그 수도회에서 존경받고 있다.페르난도 3세는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지 않도록 주의했는데, 그는 자신이 말했듯이 한 가난한 여자의 저주를 온 사라센 군대보다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다.[2]
4. 4. 시성과 현대적 의미
페르난도 3세는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2] 오늘날 성 페르난도의 부패하지 않은 시신은 세비야 대성당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그는 왕다운 금과 수정 관에 안치되어 있으며,[2] 머리에는 여전히 금관이 씌워져 있고, 성모 마리아상 아래에 놓여 있다.[2] 그의 이름을 딴 산 페르난도라는 이름의 여러 곳이 스페인 제국 전역에 세워졌다. 그의 초상, 즉위식, 검과 구는 세비야 축구 클럽의 문장에 묘사되어 있다.그의 왕으로서의 권력의 상징은 로베라 검이었다.
성 페르난도는 세비야, 아랑후에스, 산 페르난도 데 에나레스, 마스팔로마스, 피비하이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수호성인이다. 또한 스페인 육군 공병대와 일반적으로 기술자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3]
1819년 산 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 교구( "테네리페 교구"라고도 함, 카나리아 제도) 설립 이후, 성 페르난도는 피우스 7세가 발표한 교황령에 따라 해당 교구와 그 대성당의 공동 수호성인이 되었다.[4] 이는 라 라구나가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 성 페르난도를 모시는 세비야의 수도를 가진 세비야 대교구의 속주교구이기 때문이다. '비르헨 데 로스 레예스'(Virgen de los Reyes)와 함께 세비야의 공동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성 페르난도는 또한 '산 페르난도 문학대학교'(Universidad Literaria de San Fernando)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라 라구나 대학교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5]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뛰어난 지휘 능력과 정치적 감각은 연대기 작가들도 인정하는 바이며, 국왕군과 기사단 등의 혼성군을 지휘하여 이웃 국가들과 귀족들과의 분쟁을 거의 일으키지 않고 레콩키스타를 완수했다. 안달루시아 도시들에 대한 항복 조건은 관대한 태도로 임했으나, 프리에고나 칸티야나 등의 도시를 공격하여 주민을 학살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강하게 저항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슬림 주민들에게 모든 소지품을 가지고 떠날 것을 허락했고, 남아 있는 자들도 도시를 떠나는 것을 전제로 농촌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타이파들의 항쟁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처음에는 바이야스, 다음에는 후드, 나아가 무함마드 1세와 연합 상대를 바꾸면서 레콩키스타를 진행하여, 최종적으로 무함마드 1세를 신하로 삼고 조공과 군사 지원까지 받아냈다. 교황을 정점으로 성직자들과 교회, 수도원 등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고, 그들 덕분에 페르난도 3세는 레콩키스타를 사실상 종결짓게 되었다.
한편, 종교에 관대한 면도 있어 안달루시아 도시들에 대한 항복 조건이나 무함마드 1세와의 종속 관계에도 그러한 사정이 보인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위에 군림하는 “삼종교의 왕”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스스로 그렇게 자칭하기도 했던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 대성당에 매장되었고, 아들 알폰소 10세가 만들게 한 묘비에는 당시의 다언어 사회를 반영하여 카스티야어 외에 아랍어, 히브리어, 라틴어로 묘비명이 새겨졌다. 이것은 다민족·다종교 국가를 이상으로 하여 그 계승을 후대의 국왕에게 남긴 유언이 되고 있다.
후세에 페르난도 3세는 레콩키스타 성공의 공적을 칭송받아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왕”(el Santo)의 칭호를 받았다. 이는, 사촌이자 역시 “성왕”이라 불리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나란히 평가받는 것이다. 하지만 13세기의 교황들은 페르난도 3세가 이교도를 포용하고 있던 사실 때문에 시성하지 않았고, 400년 이상 후에 스페인이 교황청에 탄원한 결과였다.
참조
[1]
백과사전
Ferdinand III. of Castile
[2]
웹사이트
Roman Catholic Saints
https://www.roman-ca[...]
[3]
서적
Brewer's Dictionary of Phrase & Fable
Cassell Ltd.
[4]
서적
Patrimonio e historia de la antigua Catedral de La Laguna
https://www.academia[...]
Diocesis of San Cristóbal de la Laguna, Government of the Canary Islands, et al
[5]
웹사이트
Orígenes de la ULL
http://www.ull.es/vi[...]
201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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